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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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이다. 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ān Gāzi)라는 베이(Bey, 부족장)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로 시작해 정복전쟁을 통해 룸 셀주크 멸망 이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 아나톨리아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해 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서로는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여 그 당시 전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능한 황제까지 잇따라 배출되어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산업혁명의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 영토를 하나하나 잃으며 세가 수축되다가 제 1차 세계대전 시기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최악의 수를 두고 연합국에 패배하였다.[21] 이후, 내부 소수민족 대다수가 독립하고, 그리스에게 국가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의 해안가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에 뜻에 의해 갈라져 열강들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뻔했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휘 아래에 기사회생하여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족의 국민 국가, 터키 공화국으로 개편되며 1922년 11월 1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왕조의 종교는 이슬람이었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기에, 이슬람을 국교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실제로, 제국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한 시기는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1876 kanun-ı esasi)이 처음으로 제국의 존속기간(1299~1922)을 따져보면 623년 역사 중 46년밖에 안 된다.
2. 국명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왕가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 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영미권에서는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으로 부르며, 과거에는 오스만 터키라고 하기도 했다. 터키어 발음으로는 투르크가 아니라 튀르크이기 때문에 오스만 튀르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학술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나 오스만 튀르크나 둘 다 틀렸고, 오스만 제국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튀르크(Türk)라는 말은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있었지만 튀르크어를 모어로 하는 집단이 아니라, 척박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민들이나 유목민 부류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었다. 가난뱅이, 시골뜨기처럼 좋지 않은 뉘앙스의 말이었기 때문에 남을 욕할 때나 쓰였고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튀르크를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지역의 기독교도 신민들도 투르크라는 말을 썼는데, 이 경우에는 민족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그냥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22] 예컨대 그리스 혈통이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면 그리스인들은 그 사람을 투르키(τούρκοι)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발칸 지역의 일부 국가들에는 무슬림을 싸잡아 투르크, 터키 놈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남아 있다.
튀르크가 민족 정체성을 뜻하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민족주의 물결에 따른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수많은 종족들을 지배했는데, 이 때의 제국은 신민들을 종교에 따라 나누어 다스렸을 뿐 민족 정체성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 말기가 되자 유럽에 불던 내셔널리즘 열풍의 영향을 받은 신민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단일 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런 독립운동들이 성공하면서 제국의 다민족국가적 특성은 점점 약해졌고, 거기에 더해 제국의 국력 자체가 쇠퇴하여 많은 영토를 유럽 열강에 빼앗기면서 제국 내에서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오스만어(터키어)를 쓰는 아나톨리아 출신 사람들'의 인구 비중이 전례 없이 커지게 되었다. 이 지역 패권국가로서의 선배 격인 동로마제국이 쪼그라들면서 안 그래도 높던 제국 내 정교도 그리스어 사용자의 상대적 비중이 더욱 올라가서, 말기에는 사실상 그리스 민족국가나 마찬가지가 된 것과 놀라울 정도로 거의 같은 현상이다. 여하튼 이들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재발견된 말이 바로 튀르크이다. 이후 튀르크 민족주의가 제국 내에서 큰 지지를 받게 되고, 그 거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튀르크 민족국가를 표방한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튀르크 민족이라는 개념이 완성되었다.
오스만 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신민들을 가리킬 때 쓴 말은 오스만인(Osmanlı)이었다. 이 말은 오스만 제국이 소규모 군장국가이던 시절 오스만 가문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던 말인데, 제국이 거대하게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관리나 군인 등 제국 지배층과 식자층을 주로 가르키는 말이 되었다. 바예지드 1세가 룸 셀주크에서 분열된 국가들을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과정에서 룸 술탄(رُّومُ سلطان)을,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룸 카이사르(قیصر روم, Kaysar-i Rûm)을 자칭하면서, 오스만 제국 전기에는 ‘로마국(مَمْلَكَةت رُّومُ, Memleket-i Rûm, دیارت رُّومُ, Diyâr-i Rûm, اقليمت رُّومُ iklîm-i Rûm)라는 국호도 사용되었으며,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던 동로마 고지의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역의 지배층과 식자층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문명,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다.[23] 그들은 또 로마 지방(동로마 고지)에 산다는 의미에서 로마인(Rûmi)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로마 계승 의식과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바예지드 2세와 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각각 쇠퇴하고 점차 제국 내의 그리스 정교회 신민들을 가리키는 쪽으로 의미가 굳어 그리스 독립 이후에는 확실하게 후자로 의미가 고착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흐메트 1세나 메흐메트 4세는 종종 로마의 황제[24] 를 자칭했다. 오스만인들에게 있어 사파비 제국을 비롯한 동쪽의 외국(عجم, Acam)과 대비되는 내지는 로마(Rûmi)였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 바깥의 다른 튀르크계 국가나 민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아나톨리아, 룸(Ruhm / Rum) 등으로 불렀다. 제국 말기에 튀르크 민족주의가 득세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은 튀르크라는 정체성이 없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국가/민족들도 범튀르크주의와 투란주의가 유입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을 튀르크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튀르크 민족의 이런 상세한 사정에 대해 잘 몰랐고, 오스만 제국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 '투르크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정식 국호인 오스만을 잘 쓰지 않고 그냥 투르크 제국(Imperium Turcicum, Imperium Turcarum), 터키(Turchia) 등을 훨씬 많이 썼다. 오스만 투르크라는 표현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기존의 관습적 표현인 투르크에 원래 국호인 오스만을 덧붙여 만든 잘못된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엔 그냥 투르크나 터키라고 불렀는데,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자 오늘날 터키(터키 공화국)가 아닌 옛날 터키(오스만 제국)를 가리키기 위해 투르크, 터키 앞에 오스만을 덧붙인 것이다. 21세기 들어 용어를 엄밀하게 따지는 학술용어로서 이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일반인들의 글에서는 한국이든 서구권이든 오래된 습관이 잘 바뀌지 않아서 아직까지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역사
4. 국력
역대 중동 제국 중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이었다. 한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냈다 하면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25] 강력한 제국이었으며[26] 유럽 중부·동부에 '''제대로 된 공포'''를 느끼게 해 준 단 둘뿐인 제국인 데다가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멋진 명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세간에 유명하기도 하다. 유럽사에서 악의 축이나 마왕 같은 이미지로 서로 전투를 벌이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이 상대라면 신성 동맹등 기독교적 명분 아래 한 뜻이 되어 연합군을 편성하는 일도 빈번했다. 유럽 국가뿐 아니라 같은 이슬람이고 부분/전면적으로 투르크계 국가이기까지 한 카라만 공국, 백양 왕조, 사파비 왕조, 맘루크 왕조도 다같이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려 하기도 했을정도다. 19세기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까지 유럽세계의 공공의 적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래 있던 왕조 중 하나인데 600여 년간이나 존속하였다. 웬만한 이슬람 왕조는 단명하는 사례가 많지만 오스만 왕조는 600년이나 갔다.[27] 게다가 적어도 부르사, 에디르네 초기 양대 수도 점령 이전까진 거의 구전 설화 수준으로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후로는 몇몇 술탄 개인이 문약한 성격이었거나 술탄의 모후들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예니체리 친위대에게 황제권이 농락 당한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왕조들 중 독보적으로 오랬동안 안정적인 황제권을 휘두른 국가이다. 동시대 사파비 왕조는 훨씬 일찍 18세기 초반, 그것도 내부 권력 구조의 취약함이란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방 토후였던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반란으로 멸망했고, 무굴 제국 또한 알람기르 1세 치세의 과다한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반란을 틀어막지 못한 채 18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델리 일대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 식물 정권으로 마지막 한세기를보낸 걸 보면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끝에서 네 번째인 압뒬하미트 2세(1876~1909년 제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그대로 전제 권력을 유지했으니 이슬람 왕조 국가들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근대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중앙 집권 전제군주정을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소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여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상당 부분 부정하고 세워졌기에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더라도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당장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말리즘 또는 '여섯 개의 화살'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 통제, 세속주의, 혁명인데, 이 가운데 공화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명백히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도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또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민주의도 무슬림과 무슬림이 아닌 자(즘미)를 차별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데다 황제가 곧 칼리파이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의 체제와 세속주의 역시 명백히 위배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터키 공화국의 전신인 것은 맞지만[28] 오스만 제국과 터키 공화국의 관계는 조선,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관계와 유사하다.
4.1.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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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역사상 최대 판도를 자랑한 1683년 빈 포위 직전의 오스만 제국.
■ 직할지
■ 봉신국 및 자치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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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3년 이전까지 상실한 봉신국
전성기 시절에는 터키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 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29][30] , 서아시아[31] , 캅카스의 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소위 세 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라는 묘사로 종종 회자된다.
한창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절정에 이른 16세기 후반~17세기 초중반에는 북쪽 헝가리,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직접적인 대결뿐만 아니라 저 동쪽 멀리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무스카트를 잠시 탈환하였고 이후 1650년에 건국된 무스카트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의 주요 속국중 하나였다. 그리고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을 지원해 에티오피아를 멸망시킬 뻔 하기도 했을 정도로 본격적인 세계 제국으로서의 국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스페인 제국 내부의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인들에게도 미쳤다. 스페인 제국은 항상 모리스코 공동체에 미치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우려하였고 이는 모리스코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결국 1567년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오스만 제국은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였다. 1522년 로도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수시로 이루어 졌으며 몰타 공방전에서 구호기사단이 승리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할 것을 우려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이 시들시들해진 19세기에도 칼리프국이라는 영향력이 남아 있었는지 청나라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야쿱 벡이 오스만 제국과 수교하며 에미르로 인정받고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하였다.
또한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온 유럽을 휩쓸 때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32] , 1545년 모로코의 술탄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지 못했던 모로코 역시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은 모로코의 술탄을 교체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다.[33]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슬람 토호국들,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 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무역 루트를 둘러싼 이슬람-가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건 영문 위키의 일련의 사건 참조.
4.2. 인구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 직전 최대 판도를 자랑할 당시의 인구가 대략 3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대 중국 및 인도는 이미 1억을 넘는 수준이라 비교가 안 되고,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400만 명 정도, 동시기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을 넘었다.[34][35] 프랑스와 오스만 간 영토 크기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제국 동부 역시 오스만 제국보다 작다. 반면에 동시대 유럽 전체의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어 오스만의 4배나 되었다. 그나마 3천만 명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 때의 인구로, 인구상으로 최정점을 찍은 시기인 1856년에 고작 3500만 명, 코스탄티니예 주변과 중동 일대만 간수한 말기인 1914년에는 2천만도 안 되는 1852만에 불과했다.
참고로 1906년 조사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 비중이 74%에 불과했다. 그리스인이 14.6%, 아르메니아인이 5.5%, 불가리아인 3.7% 등 기독교인 인구도 많았다. 문제는 이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던 열강인 이탈리아보다 1천만 이상이나 적었다. 즉, 20세기에 와서는 인구에서 유럽 전체도 아니라, 유럽 열강의 한 국가 보다도 열세였던 것. 오스만이 망하고 들어선 신생 터키 공화국도 인구가 고작 1463만에 불과했다. 참고로 신생 터키 공화국과 한바탕 전쟁을 벌인 당시 그리스 인구가 약 750만 정도로 터키에 거주하는 그리스계가 200만 명 정도이니 그리스 입장에선 해볼 만하다고 느낀 셈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인구와 농토가 로마 시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지속적인 사막화로 인구부양력이 오히려 감소한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인구가 오늘날까지 유럽보다 적은 것도 이것 때문이다. 인구와 농토가 지속해서 감소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풍요롭던 옥토의 상당수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버렸고, 살 만한 땅도 끊임없는 전쟁과 간헐적인 학살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36]
4.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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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군사 조직은 크게 지방의 군사 봉토를 받아서 그곳에 거주를 하면서 징세권을 행사를 하던 지방 상비군인 시파히와 중앙 상비군인 카프쿨루가 있었다. 카프쿨루의 인원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제국에 거주를 하는 그리스도인 자제들을 징집을 하는 것으로 충당을 했다. 카프쿨루 군단은 수행 임무에 따라서 7대 단위 부대로 구성이 되었다. 부대의 구성은 아제미, 예니체리, 제베지, 톱추, 톱아라바즈, 훔바라즈, 라음즈의 7개 단위로 구성을 했다. 그 중에서 최정예인 예니체리는 화기가 등장을 하던 16세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이 되어서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동원력이 뛰어났는데 황제가 친정을 하면 적어도 10만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이 동원될 정도였다.
4.3.1. 지방 상비군
티마를르 시파히: 지방에서 군사 봉토를 받아 징세권 행사를 하던 상비군. 서유럽의 기사(역사)와 비슷하며 봉건영주들이라고 보면 됨. 투르크의 전통세력
4.3.1.1. 계급
- 티마르(2만 에이커 미만 + 최대 5명의 제벨루): 일반병들에게 배분
- 지아멧(ziamet, 2만 에이커 이상에서 10만 에이커 미만 + 최대 20명의 제벨루): 중간장교급
- 하스(has, 최소 10만 에이커에 달하는 대토지 + 20명 이상의 제벨루): 최고위 장교 전용
4.3.1.2. 지역
서로의 홈그라운드에 와서 싸울 때에는 본인이 우익[37] 에, 상대방의 영역에서 싸울 때에는 본인이 좌익에 배치됨.
- 루멜리 시파히
- 아나돌루 시파히
- 거주지: 아나톨리아
- 무장: 둥근 방패, 킬트, 터키식 복합궁, 검 등 전통적 궁기병의 무장.
- 전술: 보통 궁기병이 그렇듯, 활과 화살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가 기본
4.3.2. 중앙 상비군
카프쿨루 ← 데브시르메 제도(그리스도인 자제들 대상으로 한 징집)에서 충당.
4.3.2.1. 기병(시파히) 6 부대
- 시파히: 오스만 제국의 귀족 엘리트들에게서 모집, 술탄의 경호대 및 의장대, 가장 대규모
- 실라흐타르: 레인저 같은 특공대, 가장 뛰어난 전사만이 속할 수 있었음. 일반병사들도 전공을 세웠다면 포함가능
- 사으 울루페시: 중산층 출신
- 솔 울루페시: 중산층 출신
- 사으 가립: 하류층 출신, 경무장
- 솔 가립: 하류층 출신, 경무장
4.3.2.2. 보병의 7부대
4.3.2.2.1. 예니체리
어원: 예니센(튀르크어), 뜻: 신군대
최정예 보병. 화기가 등장한 16세기 이후 중요성이 부각되어 군사집단으로 발전
- 배치 지역별, 규모별 분류
- 기능별 분류
- 지르힐 네페르(갑주병사): 경번갑, 투구 + 다양한 검, 전투도끼, 폴 암, 갈고리 창, 메이스, 단검, 발칸식 방패
- 옥추(궁수): 복합궁, 차가라(석궁), 젬베렉(굵은 화살용 대형 석궁), 검, 도끼, 단검
- 튀펙치(머스킷 사수) 머스킷(참호거치식, 부싯돌 격발식, 화승식, 기병용), 검, 도끼, 단검
- 솔락/페익(정예부대원): 투구만 착용, 갑옷은 입지 않음 + 가다라(미늘창), 단검/ 복합궁, 창
- 보스탄즈(궁궐경비대)
- 예니체리 무장
- 예니체리 복장
- 머리
- 일반: 뵈르크(45cm 길이의 하얀색 머리 보호대, 깃털을 꽂고 행군함): 술탄이 옷에서 잘라 하사한 소매를 모자로 쓴 것이 시초
- 궁궐경비대(보스탄즈): 바타라(붉은색 머리보호대)
- 상의
- 정예(솔락/페익): 노란색 군복 + 청동제 투구
- 일반: 돌라마(빨강과 노란색 로브)
- 궁궐경비대(보스탄즈): 붉은색 로브
- 하의: 치마(청색, 암청색)
- 군화
- 고급장교: 붉은색
- 하급장교: 검은색
- 머리
- 예니체리 머리 스타일
- 정수리의 한 움큼만 남겨놓고 삭발: 참수 후 잡기 편하라고(;;;)
- 예니체리 수염 스타일
- 콧수염만: 당시, 턱수염은 자유민의 상징. 예니체리는 술탄의 개인 소유 노예
4.3.2.2.2. 아제미
예니체리 중에서 정원이 차서 떨어진 자들로 구성
4.3.2.2.3. 제베지
전투 담당이 아닌, 무기 제작과 관리 담당 장인, 전시에는 수송업무 담당
4.3.2.2.4. 톱추
전문 화포 담당 군인, 공성속도 올리는 것이 목적
4.3.2.2.5. 톱아라바즈
대포를 끄는 마차를 담당하는 군인
4.3.2.2.6. 훔바라즈
화포 제작 관리자. 분해와 조립 숙달이 목적
4.3.2.2.7. 라음즈
다른 부대와 협력하여 다양한 공작활동 담당
4.3.3. 전략
먼저 지방세력(시파히)을 보내 상대방을 지치게 한 후, 정예군(예니체리)을 보내는 방식
4.3.4. 보급
오스만 제국 관료들은 원정이 있기 전 군대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을 계산해야 했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전부 현지에서 구매하거나 현지에 세워둔 창고에서 해결하려 들면 해당 지역의 물가가 심각하게 교란될 수 있었으므로, 관료들은 이전 원정에서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새로 구입해야 하거나 보급해야 하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지 분석해서 필요한 식량의 양을 결정해야 했다. 또 다음해의 원정을 위해 그해에 모은 식량을 몽땅 써 버릴 수는 없었으니 잉여분도 충분히 잡아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을 징발한 게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관료들은 식량 운송비는 물론 식량 구입비까지 계산해야 했다. 주둔지나 행군경로 인근의 작황이 좋지 않으면 당연히 구입비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았다가 남은 식량은 비축되기도 했지만 봄이나 추수기에 구입한 가격으로 다시 해당 지역에 되팔았는데, 대개 원정이 겨울에 끝나다보니 식량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정부가 저가로 식량을 판매하는 것은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4.3.5. 상인
오스만 제국군은 보급부대와 함께 다수의 상인들을 데리고 다녔다. 1570년대 크레타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과 외과의들이 동행했고, 1730년의 동방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뿐만 아니라 제화공, 이발사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장비들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도 챙겨 갔다. '징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원정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1730년 원정 시 참가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고 불만을 품고, 결국 이 불만이 폭발해 술탄 아흐메드 3세가 퇴위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중동에서 상인들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도 이란의 상인들은 영국의 담배전매권을 취소시킨다든지, 헌법을 도입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화폐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기 바빴는데, 1586년 오스만과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 시 타브리즈의 수비군들은 자신들의 지급받은 화폐의 가치가 이전의 3/5로 떨어지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이 시기 원정을 다룬 역사가 무스타파 알리에 따르면 당시 카프카즈 지역에서 밀가루 1옥카(okkas=1.28kg)는 66악체, 빵 1옥카는 알툰(altun)금화 두개, 즉 250악체와 맞먹었는데, 여기 주둔하던 병사들의 급료는 하루 5 악체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 병사들은 당연히 이 지역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군대는 통솔을 잘 따르지 않거나 아예 반란에까지 동참하게 되었고, 예니체리들마저 부업에 나서게 되었다.
4.3.6. 공군 최초 보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독립된 공군을 창설, 운영한 나라다. 오스만 제국에 비행기가 들어온건 1909년 11월에 벨기에인 파일럿 바롱 드 카테르(Baron de Catters)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시연한 부아생(Voisin)형 비행기로 중량 500kg, 최대 시속 76km로 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를 본 술탄 메흐메트 5세가 앞으로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청년 튀르크당과 함께 1911년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초기에는 17기 밖에 안되는 비행기를 가지고 정찰 및 전령 목적으로 운영했지만 1912년에 발발한 발칸 전쟁과 같은 해에 있었던 리비아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고, 공화국 성립 이후 터키군이 이 부대를 인수받아서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또 오스만 제국 공군은 세계 최초의 흑인 파일럿인 아흐메트 알리 첼릭텐(Ahmet Ali Çelikten)을 배출했다. 오스만 제국의 아프리카 영토 일부, 아라비아 반도 일부 지역에 흑인 거주민들이 있었으며 수도에도 흑인 노예들, 황실 하렘의 흑인 환관들도 존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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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남동 유럽 전쟁 당시 오스만 제국 공군의 모습)
4.3.7. 군악대
오스만 제국은 인류 역사상, 적어도 유럽 사상 최초로 군악대를 운용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고대부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한 용도로 나팔 소리 같은 것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순수하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목적만으로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정예군인 예니체리이다. 예니체리 내에 딸린 군악대를 메흐테르(Mehter)라고 하는데 이는 해당 문서 참조.
5. 문화
5.1.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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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복식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랍복식과는 차이가 있는데 튀르크 복식을 기반으로 페르시아와 동로마 복식에서 영향을 받은것도 상당하다.[38]
5.1.1. 모자(on the head)
- kalpak, sarık(터번)
- başlık: perisani(슐레이만 시대) → fez
- kulah's covered with abani, yemeni
- yusufi, orji, katibi, kavaze, etc.
- kavuk: 가장 일반적인 배쉬크
- tarpuş: 여성용 모자
5.1.2. 조끼(vest)
- caftans with fur lining and embroidery: 상류층
- cübbe, hırka: 중류층
- cepken, yelek: 하류층
5.1.3. 상의
- mintan, zibin, şalvar, kuşak, potur, entari
5.1.4. 하의
5.1.5. 신발(feet)
- çarık, çizme, cedik, yemeni
6. 행정 구역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은 크게 1867년 이전과 그 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해 1월 21일을 기하여 최상위 지방 행정 구역이 에얄레트(Eyalet)에서 빌라예트(Vilayet)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먼저 1867년 이전까지 지방의 최상위 행정 구역이었던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일릭(Beylerbeylik) 또는 파샬륵(Paşaıik)라고 했는데, 1365년 무렵에 오스만 제국령 남동유럽을 통째로 '루멜리 에얄레트(Rumeli Eyalet)' 로 묶은 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남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는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사이에 동로마 제국 영토가 놓여 있어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39] , 이에 루멜리 전체를 지방 행정 구역으로 묶어 관리하려던 것. 이후 바예지트 1세가 루멜리로 군사 원정을 떠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도 아나돌루 에얄레트(Anadolu Eyalet)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게 되었고, 1398년에 아나톨리아 동부의 튀르크계 공국이었던 에레트나 공국을 멸하고 그 땅에 룸 에얄레트(Rûm Eyalet)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5, 16세기까지 메흐메트 2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등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에얄레트가 계속해서 설치되게 된다. 각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이(Beylerbey)[40] 라 불리는 총독이 관할했으며, 하위단위인 산작(Sancak)으로 나누어졌지만 일부는 시파히들에게 하사하는 영지로 편성되기도 했다. '메흐메트 알리' 문단에 소개된 것처럼, 베일레르베이들은 각자가 담당한 에얄레트 내에서는 군사권, 행정권, 경찰권 등 폭넓은 권한을 보유하며 그 지방 내에서는 황제와 거의 유사한 권한을 행사했다.
각 에얄레트 아래에는, 산작이라 불리는 하위 행정 구역이 있었다. 각 산작은 산작베이(Sancakbey)라 불리는 지방관이 관할했으며, 에얄레트의 하위 단위인데다 그만큼 관할 범위도 좁다는 것을 제외하면 에얄레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처음 생겨난 것은 이쪽이 조금 더 일러서,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4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또한 각 산작 아래에는 카자(Kaza)라 불리는 최하위 행정 구역이 있었는데, 이쯤 되면 향촌 단위로 카디(kadi)라 불리는 법관이 통치하거나[41]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기 이전에 유력한 부족이나 귀족이 통치하고 있던 경우 자치를 인정해주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동부의 쿠르드족과 남동부의 아랍인들은 동쪽에 위치한 강력한 적인 사파비 왕조에 맞서기 위해 이들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화국시기 직전까지도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에얄레트와 산작은 지방 행정 단위이기도 했지만, 그 동시에 군대 편제이기도 했다. 먼저 베일레르베이와 산작베이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각자 맡은 구역에 대한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산작베이는 각자가 맡은 산작이 속한 에얄레트를 다스리는 베일레르베이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각 베일레르베이는 원정을 총지휘하는 황제 또는 재상의 지휘하에 들어가거나 원정의 규모가 작다면 베일레르베이가 총사령관을 맡는 체제였기 때문. 실제로 산작라는 말 자체가 터키어로 '군기'라는 뜻이다.
1867년 이전까지의 최상위 행정 구역이었던 에얄레트와 그를 대신하게 된 빌라예트의 가장 큰 차이는, 각 에얄레트(또는 빌라예트)의 크기가 대체로 일정한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그때그때 정복한 땅에 설치되었던 에얄레트는 크기가 완전히 제각각이어서 두어 개의 산작만을 거느린 에얄레트가 있는가 하면[42] 스무 개가 넘는 산작을 거느린 에야레트도 있을 정도였는데[43] , 오스만 제국이 잘 나갈 때야 지방 행정 구역을 어떻게 짜든 상관이 없었지만 남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심심하면 러시아가 쳐들어오고 하는 상황에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방 행정 제도가 필요했던 것. 1878년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빌라예트 체제는 다음과 같다. 자세히 보면 당시의 오스만 행정 구역이 거의 정확하게 이라크(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이집트(므스르 헤디브령), 리비아(트라블루스가르프 빌라예트),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스나 빌라예트)의 전신임을 볼 수 있다.
7. 세금 제도
밀레트 제도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백성들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서로 다른 세금을 납부했다. 무슬림은 소작민의 경우 지대, 도시민의 경우 도시세, 종교세이자 소득세 역할을 한 제캬트(Zekât)[44] , 그리고 병역 혹은 병역을 대신할 세금을 납부했으며 기독교인은 소작민의 경우 지대, 도시민의 경우 도시세, 교회에 납부하는 십일조, 비무슬림에 대한 생명 및 재산 보호세 명목이지만 사실상 소득세의 역할을 한 지즈야(Cizye)를 납부했다. 기본적으로 세금은 각 가정의 '''노동이 가능한 성인이자 자유인인 남성 인구'''를 대상으로 부과되었으며, 어린이, 여성, 장애인, 노인, 노예등은 모든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지즈야를 납부하는 비무슬림 인구는 지즈야가 소득세 겸 병역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다. 지즈야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세금들은 빈민층, 특히 농노에게는 가혹했지만 부유층에게는 그다지 높은 세금이 아니었다. 세금을 걷는 관료는 각 세금 종류마다 다 다른데, 이를테면 제캬트와 십일조는 각자의 종교시설에 납부하는 세금이고, 지즈야의 경우 지즈예다르(Cizyedar)라고 불리는 지즈야를 책정하고 걷는 세무원에게 납부하고, 지대와 도시세는 봉건 영주 혹은 각 도시의 총독에게 납부하는 세금이다. 이렇게 걷어진 세금은 각각 중앙에 납부하는 할당량을 제외하고는 해당 주체가 자유롭게 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중앙에서 할당한 세금보다 많은 양을 거두어 지방, 도시, 모스크, 교회에서 예산으로 활용했다.
당시 조세 저항이 가장 심했던 오늘날의 알바니아 지역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알바니아 산골 마을에 지즈예다르가 찾아왔다. 목적은 당연히 지즈야를 거두려는 것인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총을 가지고 나와 허공에 대고 쏘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 지즈야를 낼 수 없다!" 고 뻗대기에 지즈예다르는 소득없이 돌아갔다. 그 후 모병관이 마을을 찾아와서 "당신네들은 무슬림이니 군대를 가거나 병역세를 내라!" 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총을 쏴대면서 "우리는 조상 대대로 기독교인이다. 우리가 왜 군대를 가야 하냐?" 라며 모병관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그 다음 달에는 지즈예다르가 다시 찾아왔고, 또 총을 쏴대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 라며 쫓아내어 마을 사람들은 사실상 면세를 누렸다는 일화인데, 오스만 제국의 복잡한 세금 제도와 부실한 지방 장악력이 드러나는 일화.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치는 주요 거점 만을 장악한 형태로, 촌락, 부족, 지주들의 영지는 각 촌장, 부족, 지주 등 유력자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고유 권한은 중앙 정부나 지방 총독도 간섭할 수 없었다.
8. 종교 국가인가?
8.1. 맞다는 의견
제 아무리 세계총대주교좌가 술탄에게서 권리를 인정받았어도 기독교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에 비하면 초라한게 현실이고 그거 당시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명백한 탄압과 차별이다. 15-18세기까지 세계총대주교좌를 비롯한 정교회 총대주교좌들은 유일한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에 재정지원을 받아야만 했고 심지어 이를 위해서 세계총대주교가 직접 러시아로 간 사례까지 존재한다. 관련 문서 전반에서 세계총대주교와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왜곡하는데 이들이 술탄한테 '''우리 조국을 멸망시켰지만 교회 약탈을 금지하셨으니 감사하다''', '''라틴 이단은 싫지만 나라를 멸망시킨 이슬람은 상관없다'''라고 진심으로 여겼다고 믿는다면 이건 도를 넘은 수준이다.
조선에서 불교는 문화의 일부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교황청이 차르에게 카톨릭에 대한 지원에 감사를 표했고, 소련에서 정교회는 해외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조차 '스탈린이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바티칸으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평할 정도로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결국 실질적으로 인구 대다수는 종교인이었고 공산당원들조차도 각자 종교를 가졌다. 이를 근거로 조선이 유교 국가가 아니고 러시아 제국은 정교회 국가가 아니며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는건 지나친 비약이다.
여러 종교인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거 자체는 굳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가 아닌 종교국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이런 사례를 가지고 전근대 왕정국가에서 종교와 민족과 관련되어 정말 어떠한 차별과 탄압이 없으며 종교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오스만 국가 내에서 이슬람이 핵심 계층 혹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8.2. 아니라는 의견
초창기에는 튀르크 부족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로마와의 성전"을 명분으로 세력을 끌어모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시기 까지 가지(Gazi)로 대표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영토 확장으로 대규모의 비무슬림 피정복민들을 끌어안는 상황이 되자 이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급속도로 팽창한 15세기 초부터 발칸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 19세기 말까지 대략 4세기 동안 제국 내에는 무슬림보다 비무슬림 인구가 더 많았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 까지도 제국의 백성들을 '그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 밀레트)를 형성하게 하여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통치하고, 형법(Kanun) 만큼은 모든 밀레트가 공통적으로 지키게 했다.
그리고 가지의 의미가 이슬람 전사라 하더라도 딱히 십자군 전쟁 같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전쟁을 한 것도 아니다. 상술 된 오스만 건국에 대한 일화가 보여주듯 기독교계라도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면 얼마든지 동맹이나 파트너가 될 수 있었고, 초기 오스만 공국 입장에선 동로마가 워낙 가깝고 군침흘릴만한 문화 유산이 많았긴 했어도, 인근의 아이딘 공국 같은 다른 무슬림 아나톨리아 튀르크 공국들도 실컷 털어먹었다. 14-15세기 아나톨리아 문맥에서 '가지'의 종교성은 사실 저렇게 노략질로 벌은 돈으로 수피 순례자들 모시고, 이마렛이라 하는 모스크와 그 옆에 딸려 있는 여행자용 편의 시설을 건설하는 등 비전투적인 면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때문에 민족주의 열풍으로 제국이 조각나기 시작하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종교 문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이었다. 각자의 종교법에서 금지하는 것[45] 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서로 다른 밀레트 간의 민사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밀레트에 속하지 않은 판관에게 가서 재판을 요구하는 일도 매우 흔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가 당시의 풍토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자신을 소를 떼먹고 돌려주지 않는 아들에게 샤리아법대로 돌려받기를 원하는 정교회 신자 아버지나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척)하고 남편을 '불신자'로 보아 혼인 무효를 이끌어내는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여성,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튀르크인 선원,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 푸닥거리를 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불가리아의 한 시골 마을 같은 이야기를 보면 당시의 사회가 오늘날 이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심지어 무슬림은 튀르크인들조차도 포로로 잡힌 영국 선원들에게 '이슬람을 믿을 것을 권하다가' 이들이 한사코 개종을 거부하자, 선실 하나를 내주어 교회로 개조하게 하여 '그럼 기독교라도 열심히 믿어야지!' 하며 예배를 독려하는 튀르크인 선장 이야기라든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왜 성모님께 기도하지 않소?' 라고 개신교인 선원에게 힐난하는 무슬림 선원 등의 일화가 줄줄이 나열된다.
황제들 또한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보호하는데 헌신적이었는데,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장본인인 메흐메트 2세 조차도 전란으로 허물어진 로마 제국 시절의 정교회 성당 복구에 금전 지원을 했고 보스니아를 정복한 뒤에는 ''''제국 신민들 중 그 누구도 기독교도들이나 기독교회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라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으며[46] , 셀림 1세도 아토스 산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수도원들을 수리하게 하는 동시에 '''"그간 전쟁, 천재지변으로 무너지거나 손상된 정교회 성당, 수도원을 수리할 것이며 이들을 절대로 파손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정교회나 가톨릭, 유대교에 대한 지원을 간간히 한 기록이 발견되며, 성 니콜라오스의 교구였던 미라의 성당 또한 러시아 차르와 함께 오스만 황제의 지원을 통해 복원이 이루어졌다.[47]
사소한 부분으론 겉으로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전면적으로 술을 금지한 사례는 없었다. 애초에 오스만 황실의 기원인 튀르크계 유목민들부터가 술에 관대한 편이고, 옛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대폭 받아들이고 유럽 지역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술 문화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위에 계속 나왔듯이 당장 비(非) 무슬림 계열 백성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술을 완전 금지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아예 술탄 본인이 술을 즐기는 애주가인 경우도 있었을 지경.
일각에선 바티칸에 비교하면 피상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를 보고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그 동기로 지목하는 모양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교권은 아예 상실했지만, 딱 이 이상으론 본 적이 없는 수박 겉핥기 수준의 피상적인 평가다. 정복 후 총대주교좌 또한 처음에는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격이 높았던 성 사도 성당을 쓰게 해주었다. 성 사도 성당은 몇 년 뒤 다시 뺏기고 아예 해체,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정복자의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이건 황실의 종교적 편협성과 심술보의 산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노후화 문제로 생긴 문제로, 옮긴 옆의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상당히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다.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16세기 후반 오스만 황실이 뺏어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때 새로 받아 아직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성당인 성 요르고스 성당(아야 요르기)도 상당히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성당의 규모는 모스크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크기 자체는 작으나 적어도 지금 현대 모습으로 18세기 재건축할 때는 황실에서 당대 최신식 유럽의 건축가, 건축 기술 다 끌어오며 공들여 지은 것이며, 자세히 조목조목 살펴보면 당장 외부부터 대리석 떡칠에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호화롭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이스탄불에서 백년 전엔 이 도시의 반이 그리스어를 쓰며 정교회를 믿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로마인'''이라 불렸던 현지 그리스계 공동체가 사라진 건 오스만 제국이 망한 이후 공화정 시절 각종 재산권 분쟁을 빌미로 한 실질적인 민족 탄압 정책 이후 생겨난, 가슴 아프게도 상당히 근대의 사건들이다. 물론 터키 내 그리스계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업보라고 볼 수 있는, 그리스 내 터키계 공동체가 그리스의 변방인 서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 정도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에서 거의 해체되어버린 일도 일어났지만 말이다.
9. 튀르크족의 국가?
오스만 제국의 기원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단 오우즈인들과 일부 타타르인들이 형성한 나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요즘 터키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사학자들이나 극우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 민족국가라고 보기엔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 일단 황제의 모후들부터가 휘렘 술탄이나 쾨셈 술탄, 나크시딜 술탄등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그리스인, 슬라브인, 캅카스인(조지아인, 체르케스인 등), 알바니아인들이 대다수였던지라 제국의 황가는 비(非)튀르크계 혈통이 상당히 많이 섞였기 때문에 오스만 1세나 오르한 정도라면 모를까 후대로 가면 갈수록 '튀르크인' 이라고 하기 어려워지며[48] , 제국이 팽창하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는 민족이고 출신이고 안 가리고 오직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 활용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고향에서 헐벗은 소작농 출신의 아이도 능력만 인정받으면 이스탄불의 최고급 교육기관에서 수학하고 황제의 근위병이 되거나, 건축, 군사, 교육 분야의 능력자가 되거나, 심지어 고향에 총독으로 부임할 기회나 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재상까지 오를 기회도 열려있었다. 당장 오스만 제국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만 하더라도 순수한 튀르크 혹은 이슬람 배경을 가진 인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제국의 역대 재상들은 대부분 발칸 반도나 캅카스 출신들이었다.
제국의 영토였던 동유럽 출신 인사들을 고관으로 기용된것만큼 흔하지는 않았지만 제국 외부의 기독교 세계인 서유럽 출신 인물들이 관직에서 활약한 사례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 해적 출신들도 있었지만 당대 유럽의 상위 계층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 초빙되어 활동했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해와 기용된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오스만군의 군제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 훔바라즈 아흐메트 파샤[49] ,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한 독일 출신 메흐메트 알리 파샤[50] , 폴란드 출신 무스타파 젤라레딘 파샤[51] 등이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인 도제의 서자로 쉴레이만 1세 시절 오스만에서 베이오울루라는 이름으로 오스만의 동유럽 원정에 협력한 알비제 그리티(Alvise Gritti)의 사례도 있다. 탄지마트를 시행하면서 서유럽인 초빙 후 등용은 더 늘어났다.
(1908년 오스만 제국 의회 의원들의 출신 민족을 나타내는 지도)
동유럽, 북아프리카 영토가 독립, 혹은 서구 열강에 떨어지고 있던 제국 말엽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의회 의석들을 보면 142명의 튀르크인 의원들 외에도 아랍인 의원 60명, 알바니아인 의원 25명, 그리스인 의원 23명, 아르메니아인 의원 12명, 유대인 의원 5명, 불가리아인 의원 4명, 세르비아인 의원 3명, 블라흐인[52] 의원 1명 등 절반 가량의 의석이 비튀르크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리스를 비롯한 피지배국들이 독립하던 시절에도 압뒬하미트 2세는 민족주의가 아닌 '''범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의 공용어를 아랍어로 정하고, 제국 내에 튀르크인보다 수가 많은 아랍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기까지 했다. 아타튀르크 문서를 보면 당시에 대한 아타튀르크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이 청년튀르크당의 혁명을 초래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민족주의적 핀트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다민족,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보편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현재의 '''"터키 공화국 영토 내에서 거주하고 터키어를 사용하며, 터키 문화 속에서 자랐으며 스스로를 터키인으로 인식하는 자는 모두 터키인."'''이라는 케말리즘적 튀르크 민족주의의 정의를 최초로 내린 사람인 오스만 제국의 사회학자인 지야 괵알프(Ziya Gökalp)는 자자계 출신이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İstiklâl Marşı)을 작곡한 메흐메트 아킵 에르소이(Mehmet Âkif Ersoy)는 알바니아계 출신이다. 아타튀르크 본인도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출신에다 금발벽안의 백인의 외모를 하고 있으며, 그의 동료이자 공화국 2대 대통령으로 제임하는 이스메트 이뇌뉘는 쿠르드인, 3대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는 불가리아계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의 민족국가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평가
메소포타미아[53] 와 레반트[54] 모두를 400여년 가까이 지배하여 역사상 최장 기간 지배한 기록을 세웠다. 그 뒤로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약 200여년 간 지배하였다. 로마 제국(동로마 포함)은 이집트와 레반트는 오래 지배했지만[55] 북부 일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잠시 차지했던 것 외에는 지배한 적이 없다. 그곳 자체가 파르티아-사산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거리도 서로 멀고 국력도 강해서 완전 병탄을 할 수 없는 로마 입장에서는 잠시 찔러볼 수는 있을지언정 영유할 수는 없었다.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부터 19세기의 슈퍼 파워 영국, 20~21세기 슈퍼 파워 미국조차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장기간, 그것도 완벽히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그리고 미마르 시난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돔형 지붕의 거대 모스크들은 북쪽으로는 헝가리로 부터 시작하여 유럽에서는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그리스,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에 걸쳐 남쪽으로는 이집트, 튀니지, 수단 해안 지대, 예멘까지 엄청나게 넒은 지역에 오랜 시간 동안 수난을 당하면서도 꿋꿋히 남아 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세계사적 위세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오스만 제국 국력의 원천지이자 정치적, 경제적 핵심지였던 지방은 흔히 생각하는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 등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해안 도시들과 '로마인들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라고 불렸던 남동유럽의 현대 그리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지방 일대였는데, 정작 이곳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네가 19세기 이후 각각 민족 국가로 독립하면서 소위 과거사 청산을 위해 많은 수의 오스만 모스크들과 목욕탕, 정부 건물 등 사적들이 기독교 교회로 강제 개조하거나, 심한 경우 아예 국가 차원에서 무신론을 밀었던 공산 정권 시절 방기, 혹은 파괴당했다. 물론 독립 투쟁의 열풍이 지나간 이후 이 또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사적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 보존, 유지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자체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 되다가 발칸 전쟁과 1차세계대전이란 거대한 참화까지 맞았다 보니 역사적으로 제국 두번째 도시였던 테살로니키가 1917년에, 세번째 도시였던 스미르나가 1922년에 대방화 사건을 겪고[56] 구시가지가 싸그리 불타는 등 20세기의 참혹한 수난을 피해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당장 16~17세기에 걸쳐 변방 도시로서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자 무역로에도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이 알토란 같이 잘 개발해 놓아 16세기 말에는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대도시였던 베오그라드만 하더라도 현대에는 한때 존재했던 273개의 모스크 중 남아 있는게 하나밖에 없다.#
이에 덧붙여 추가로 설명하자면 학계 내부에서라도 민족주의적 앙금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최근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오스만의 과거 유럽 속주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자국 통치 시기를 무조건적인 암흑의 시대로만 규정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오스만의 유산에 대해 호의적인 터키 쪽에서도 핀트가 심하게 어긋난 근대 민족 국가적 관점이나, 이슬람주의적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현대적 의미의 동·서양 구분을 뛰어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정체성이 왜곡당한 면이 더욱 심했다.
오스만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했던 16~17세기 시절에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알토란 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동유럽, 아나톨리아가 핵심이었고, 그밖의 영토 중에서는 기껏해야 시리아의 알레포, 다마스쿠스 정도가 쓸만한 땅이었다.[57] 다마스쿠스는 초기 칼리파 시절 부터 근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 지방 행정 수도였고, 알레포는 십자군 전쟁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을 통한 대서방 교역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이 지방은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서부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일대에서는 그나마 짦은 시일 내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할 수 있는 거리다. 이집트는 복속 이후로도 토착 맘루크 세력의 견제 때문에 제국 중앙의 권력이 잘 안 닿았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가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빼면 쓸모 없는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였고, 튀니지, 알제리 등의 북아프리카 일대는 사막이 많은 불모지에다 제국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여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직할지가 아니라 현지 사략 해적 군벌들의 영지에 가까웠고, 현대 이라크지방 또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의 접경 지대로서 안정적으로 개발하기 힘든 땅이었다. 험준한 산맥 지형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지 않고, 현지 토착 민족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중앙의 통제가 힘든 동부 아나톨리아와 캅카스 산맥이야 말 할것도 없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으로 운영하며 정치, 군사 엘리트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인구 또한 가장 많았던 비옥하고 중요한 알토란 땅들은 당연히 이스탄불를 필두로, 셀라니크, 위스퀴프, 얀야, 이즈미르, 에디르네, 트라브존, 마나스티르, 필리베, 사라이보스나, 이슈코드라, 퓌르졘, 베오그라드, 테메슈바르 등의 현대 아나톨리아 해안가, 그리스, 남동유럽에 걸쳐져 있던 땅들인데, 이들은 로마 제국 동부의 요충지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을 통해 헬레니즘에 중점을 둔 동일한 문명권을 형성하던 지역들이다. 남동부 유럽이 터키 동부보다 백년 일찍 오스만에게 정복된 사실도 있다. 오스만이 남동부 유럽의 패자가 된 것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2차 불가리아 제국이 무너진 14세기 후반인데, 오늘날의 터키 중부 및 동부까지 오스만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반인 메흐메트 2세 치세다. 오늘날 터키가 완전히 정복된 것은 셀림 1세 때.
아무튼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술탄제에 이어 칼리파 제도 폐지하고 오스만 가문 구성원들을 모조리 국외 추방하면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으나,[58]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하에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쪽은 또 상술했다시피 오스만 제국은 종교성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고, 국가의 핵심 이데올로기 몇가지 중 하나에 불과 했으며, 무엇보다 튀르크인, 무슬림만의 것이 아닌 '''보편 제국'''을[59]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슬림 터키인들만의 전유물'''이었던양 포장하려고 들어 이건 또 나름대로 문제가 심각하다. 현대 터키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오스만 제국을 조상들의 역사로 기리며 인정하고, 자부심을 담아 묘사하려고 한다면 그때 그때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추어 어설픈 선전 영화나 찍어내고 리인액터들이나 부를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성공 비결이었던 유연한 사고 방식과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인종, 민족, 종교 분쟁과 분리주의는 민주주의 개념이 자리잡힌 현대 국가들에도 일어난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분리주의는 소수민족이 있는 한 필연적이다. 오스만 제국의 한계는 결국 명확하다. 헌법도 인권 개념도 없는 전근대 이슬람 왕정국가에서 수많은 다른 종교, 민족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무력으로 정복했고 살 권리를 줄 테니까 반항하지 말고 복종해라"라고 말한다면 이거에 수긍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는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중해권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다민족, 다문화 국가였다. 단지 이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시키는 것에 성공하고 다민족, 다문화 국가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더 이상 이렇게 불리지 않을 뿐이다. 불가리아만 하더라도 트라키아인, 슬라브인, 튀르크인이 합해졌고 이들은 문화, 종교, 언어 모두 달랐다. 그러나 결국 기존의 정체성을 버리고 불가리아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되었다. 러시아처럼 규모적으로 오스만을 능가하면서도 체제가 뒤바뀌는 와중에도 다민족 다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은 국가도 존재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불교 밀레트' 같은 거 없었지만 이 때문에 나라가 붕괴되지 않았다.
오스만은 여러 다른 국가와 민족을 정복한 승자였고 이를 오스만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안에 두려고 했다. 이 역시 '전근대적 민족주의'의 일환이다. 여기에 성공한 쪽도 있고 실패한 쪽도 있지만 오스만은 실패했고 오스만인이라는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약해서 도태되었다. 그렇다면 오스만 제국의 붕괴만을 전근대 국가의 절대적인 한계라고 일반화 할 수 있을까?
국가가 망하는 와중에 기존 체제,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악성에 따른 새 이데올로기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러시아 제국이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로 인해서, 소련이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로 인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역사적 정체성이 왜곡당한 면이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에 체제에 있다.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의 대두와 국가 해체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오스만 제국 체제의 결점과 모순에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이 둘의 인과관계를 혼동하거나 현대 유럽이나 터키가 오스만을 무조건적으로 왜곡한다고 단순화하는 것은 오스만에 대한 극단적인 찬양과 환상일 뿐이다.
11. 국가(國歌)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본격적으로 서구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마흐무트 2세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2. 역대 군주 목록
'황제'로 불리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로마 황제'를 자칭. 이것이 오스만 제국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이라는 명칭도 관습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차르와 비슷한 경우이다.
참고로 여기 나온 황제 이름들은 터키식 발음이다. 아랍식 발음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메흐메트: 무함마드(مُحَمَّد), 압뒬하미트: 압둘하미드(عَبْدُ الْحَمِيد),[60] 쉴레이만: 술라이만(سُلَيْمَان)에 대응한다. 또한 현대 터키어에서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인명들 중에 끝이 'd'로 끝나는 것을 't'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이를테면 메흐메트(Mehmet), 무라트(Murat) 같은 이름들을 터키 공화국 수립 이전에는 아랍 문자의 'd' 음가로 표기하여 메흐메드(Mehmed), 무라드(Murad)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터키어 발음에서 유성음이 끝에 위치하면 무성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음상으로는 끝에 d가 오든 t가 오든 둘다 무성음 t발음으로 나므로 의미가 없다. 또한 오늘날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오스만어에 기반한 옛날식 표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이 d와 t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해당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는데도 유용한데, 같은 압뒬하미트도 세속주의자 학자들은 Abdülhamit, 이슬람성향의 학자들은 Abdülhamid, 오스만 복고주의자나 친아랍주의자들은 아예 아랍식 철자로 Abd-ül Hamid로 쓰기 때문에 철자만으로 해당 저자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13. 대중매체에서
- 유명한 역사 RTS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나온다. 게임 내의 8개의 유럽 국가 중에서 상당히 개성이 두드러지는 독특한 국가로 나온다. 다만 고증은 좋지 않아서, 아자브를 비롯해 오스만이 활용했던 다양한 보병들은 제니세리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잘려나갔고 카프쿨루 시파히도 아니고 그냥 시파히가 오스만의 주력군이 아니라 최정예 자리를 꿰차고 있다. 오리지널 기준으로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경쟁을 벌이는 게임에 오스만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오류이며[74] , 그나마 실제와 가까운 건 포병 강국이라는 점 정도.
-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의 배경이다. 바예지드 2세 치세 말기. 구체적으로는 셀림 1세가 즉위하는 과정을 다루었으나, 고증은 심각하게 좋지 못하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문명 3부터 꾸준히 플레이할 수 있는 문명이다. 3편에서는 오스만 1세가 지도자였으며 메흐메트 2세는 문명 4 워로드에서 오스만이 추가될 때 등장했고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 때 쉴레이만 1세가 추가되었다. 문명 5, 문명 6 몰려드는 폭풍에서는 쉴레이만만 나온다. 고유 요소로는 3에서 시파히, 4에서 예니체리와 함맘(터키탕), 5에서 예니체리와 시파히, 6에서 예니체리와 뜬금없게도 바르바리 해적과 그랜드 바자르가 나왔다.
- Paradox Interactive사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이슬람의 검 DLC가 있다면 1299년~1337년[75] 사이에 플레이할 수 있다. 에르투으룰로는 1270년대~1280년대부터 플레이할 수 있으며 독립 세력으로서의 오스만은 1299년부터다. 1편에서도 나오기는 하지만 기독교 국가로만 플레이할 수 있다.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와 Victoria 시리즈에서 개근했다.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오스만이 멸망한 이후를 다루기에 플레이하려면 터키를 병합하고 괴뢰국으로 만들었다가 괴뢰국을 해체한 후 플레이하거나, Hearts of Iron IV에서 터키로 중동을 포함한 필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오스만으로 바꿔서 플레이할 수 있다. 이후 DLC가 추가되면서 술탄을 복위시키고 오스만제국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중점이 추가되었다.
- 국내 대체역사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도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전생하여 멸망의 기로에 놓인 동로마 제국을 존속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소설인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역사와 같이 당시의 오스만은 무라트 2세 치하에서 한참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주인공을 서방을 정복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알라가 자신에게 내린 시련이며 숙적임을 인정하고 무릎 꿇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역사인 만큼 끝내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아나톨리아로 밀려난데 이어 생존을 위해 맘루크에 신종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맘루크 전쟁에서 메흐메트 2세가 전사하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 토탈 워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데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에서는 오스만의 등장이라는 이벤트로 투르크 팩션이 살아있다면 오스만이 예니체리 1개 군단을 이끌고 오는 것으로 등장하고 토탈 워: 엠파이어에서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게임 시작 시점인 18세기 초에 맞춰서 최대 영토를 들고 오지만 제국이 망해갈 때라 무언가 멍한 느낌이 든다. 그 뒤의 토탈 워: 나폴레옹에서는 논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하지만 올 팩션 모드로 플레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의 절정을 보여준다. 또한 시리즈 내에서 니잠 시리즈가 나올 때까지 말 그대로 세맛 예니체리만 믿고 가야하는 팩션.
- 징기스칸 4의 PK 시나리오4에서 등장한다.
13.1. 창작물에서 모티브를 딴 것들
- 드래곤 라자 - 자이펀
- 장국의 알타이르 - 투르키에 장국
- 진격의 거인 - 중동 연합
- 창세기전 시리즈 - 투르
- 프린세스 - 스가르드
- 트리니티 블러드 - 진인류제국
- Warhammer 40,000 - 마카비안 예니체리 연대
[1] 현대 터키어로는 Osmanlı İmparatorluğu(오스만 제국)이라고 해서 오스만 제국 시절의 언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스만 제국의 식자층이 문학과 행정에서 사용한 오스만어(Osmanlıca)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았던 반면, 현대 터키어는 일반인(halk)들이 사용하던 오스만 튀르크어에서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와 문법을 최대한 없애고 고대 튀르크어식 어휘 문법과 서구식 어휘로 대체하는 인위적인 언어 '정화'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2] 참고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등의 게임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오늘날의 터키 국기 등의 이유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국기라고 하면 무조건 붉은 바탕에 흰색 초승달+별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깃발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오스만 제국 후기에 해당하는 1793년이다. [image] 게다가 초승달이 세로로 길쭉하고, 별의 모양도 다르다. 그 이전까지는 큰 초승달을 쓰지 않거나 붉은색 바탕에 노란 초승달을 사용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 참고.[3] 1882년에 황제 압뒬하미트 2세가 채택.[4] 근대의 오스만 제국의 국장이 들어가 있는 회중시계 [image][image] [5] Devlet-i Ebed Müddet[6] Memālik-i Mahrūse[7] 오스만 제국의 팽창 과정, 위에서 부터 1330년, 1683년, 1913년의 영토이다[8]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반도와 남동유럽 사이에 동로마 제국이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에 소통이 어려워 유럽(루멜리 에얄레트)에 하나, 아시아(아나돌루 에얄레트)에 하나, 총 두 곳의 수도를 필요로 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며 그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두 곳의 수도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에디르네가 정확히 몇 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었으며 언제 수도가 되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무라트 1세 대에 수도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9] 당시 8위[10] 당시 12위[11] 당시 11위[12] 불과 7년만에 인구밀집지역인 발칸 반도 영토들을 잃으며 인구가 500만 가까이 줄어버렸다. 이 인구조사는 오스만 제국 마지막 인구총조사로 밀레트에 따라 조사되었는데, 무슬림이 13.390.000명, 정교도가 1.173.422명, 아르메니아 교회 신자가 1.564.939명으로 집계되었다. 출처[13] 베이(bey)는 본래 지방 태수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이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임을 잘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만하다. 대략 왕 정도에 해당하는 술탄보다는 지위가 낮아서, 의역해서 생각하자면 '공작(公爵)' 정도라고 할 수도 있다.[14] 황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파디샤(Padişah), '술탄 중의 술탄'을 뜻하는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 es-Selatin)', '로마 황제'라는 뜻의 '카이세리 룸(Kayser-i Rûm)' 등이 쓰였다. 이 밖에도 몽골어인 한을 쓰기도 하고 셀림 1세 때 칼리파를 칭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국 말기에는 칼리파를 칭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여전히 술탄이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동안 술탄이라 했던 것이 관습화된 것으로 러시아의 군주가 차르에서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줄곧 차르라 했던 것과 비슷한 예.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서구권(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선 오스만 황제들을 '술탄'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다. 반면 터키에서는 오스만 황제들을 '파디샤'라고 부른다.[15] 터키어를 쓰지 않는 지방에 칙령을 내리거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현지의 언어도 함께 썼다. 종교인과 학자들은 아랍어, 학자와 문필가들은 페르시아어를 쓰기도 했으며, 오스만어는 이 두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6] 다만 당대에는 무슬림이냐, 정교회 기독교인이냐, 유대인이냐, 아르메니아 정교회인이냐 등을 기준으로 분류했으며 언어와 민족에 상관 없이 구분되었다. 심지어 그리스인이나 터키인 항목을 가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지만 현재에는 같은 민족으로 구분하는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과 폰토스 그리스인, 북부 그리스의 그리스인, 남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위에 언급한 민족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구분되기 시작해서 20세기에야 완성되는 개념이다.[17] 다수파는 아니지만 중동의 오리엔트 정교회 신자도 있었고 중앙 유럽 일부까지 정복한 관계로 가톨릭이나 개신교도 있었다. 짐미, 즉 비(非)무슬림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를 막지 말라는 포고를 내린 적도 있었다.[18] 맘루크 왕조의 멸망,명목상으로나마 카이로에서 명맥을 잇던 아바스 왕조의 멸망[19] 우크라이나 중남부[20] 오스만 제국 후기 리라화 개혁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이슬람 세계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7세기 쿠루시화를 발행하기 이전까지 3악체=1파라 였으며, 쿠루시화 등장 이후 40파라=1쿠루시였다. 다만 은화로는 고액 결제나 유럽과의 무역에서 불편함이 있었으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되 고액권으로 금화를 발행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금본위제 개혁으로 발행된 터키 리라화(100쿠루시=금화 1리라)이전에는 시기마다 다르지만 이스탄불 제리 마흐부브(Zer-i Mahbûb=6.5쿠루시), 이집트 제리 마흐부브(Zer-i Mahbûb-î Mısıriye=5.5쿠루시), 제디드 마흐무디예(Cedid Mahmudiye=25쿠루시), 하이리예(Hayriye=12쿠루시), 메지디예(Mecidiye=20쿠루시), 루미(Rumî=48쿠루시), 아딜리 알튼(Adlî Altın=660파라) 등의 금화들이 발행되었으며 플로린, 리브르, 파운드스털링 등 해외금화도 유통되었다. 한편 이 금화들은 시장가치에 따라 가치가 변동되었기 때문에 시대마다 그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21] 이렇게 된 경위에는 영국의 뻘짓이 가장 컸다[22] 민족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인 중세~전근대 시기에 이슬람권이 서유럽 카톨릭 신도를 퉁쳐서 그냥 프랑크인이라 부르고 동로마제국에서는 라틴인이라 불렀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23] 만주족에게 중화가 자신들이 항유한 선진적 문화인 동시에 화(華)가 한인을 의미하는 것을 떠올리면 쉽다.[24] 아흐메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티아스 2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로마와 아랍와 페르시아의 광대한 지방의 황제이자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계승자(Benki ...... Ḫakân-i Mamâlik-i fasîha-i Rûm ve 'Arab ve 'Acem ve evreng-i kaysar)를, 메흐메트 4세는 동서의 술탄과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의 모든 나라를 정복한 술탄(Benki sultân-i salâtin-i şark wa ğarb, sâhib kưân-i mamâlik-i Rûm wa 'Acem wa 'Arab)을 자처했다.[25] 중동 제국들 중에서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국가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밖에 없다. 다른 중동 제국들은 많이 동원해봐야 10만 명 미만이었다.[26] 영토의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우마이야 왕조보다는 적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고 동유럽까지 영향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알 안달루스)와 페르시아까지 정복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이 우마이야 왕조보다 더 강한 역대 이슬람 제국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1) 우마이야 왕조보다 영토 전반에 대한 장악력과 동원력이 더 높았고 2) 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에 틀어막혀 유럽 중심부와 동유럽, 발칸 반도에 대한 공세가 좌절된 우마이야 왕조에 비해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했던 근세 유럽의 영역에 끊임없이 공세를 가함으로써 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더 무서운 적'이었으며 3) 이와 연관하여 후대에 들어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열강들 중 약체화 된 18~19세기 이후는 유럽 식민 제국주의가 나머지 비서방세계를 비교적 일방적으로 침략, 정복할 만한 절대적 군사적 우위를 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을 위협한 최후의 동방/비서구 제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27] 한국사에선 천년 가까이 갔던 신라가 있었고 그 외에도 기본적으로 4~500년씩은 갔기에 오스만의 600년이 그렇게 긴게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한국은 역사적으로 이 악물고 멸망시키려고 기를 쓴 외부 세력이 빈번하지 않았기에 그랬던거고 대부분의 세계사에선 이웃국가들과 전쟁이 일상이라 한 국가와 왕조가 200년만 가도 굉장히 장수하는 편이다.[28] 다만 이조차도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가 오늘날 이탈리아를 비롯해 프랑스, 그리스, 터키,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등등의 역사이기도 하듯이 오스만 제국사 역시 터키는 물론 그리스, 세르비아 등 많은 나라들의 역사이기 때문. 더군다나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인만 우대하지 않았듯이 오스만 제국도 투르크인만 대접하는 나라가 아니었다.[29]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30] 다만 알제리와 튀니지와 리비아 같은 북아프리카 지역들은 이른바 바르바리 해적들을 이끄는 두목들이 다스리던 땅이었다. 물론 그들은 형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지만, 자신들의 영토에서 거의 왕처럼 살아가는 반독립적인 세력들이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이 북아프리카에 보낸 투르크인 관리와 군인들은 북아프리카의 현지 주민인 무어인들을 굉장히 업신여겼고, 그래서 무어인들은 투르크인들을 증오했다. 심지어 1589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규모의 반란이 트리폴리를 비롯한 리비아와 튀니지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 현지의 오스만 관리들이 주민들한테 학살당하여 오스만 제국 정부가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31]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32] 출처[33] 출처[34] 프랑스는 농토의 비율이 높아서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인구가 많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13세기 흑사병으로 1/3이 죽었는데도 인구가 1100만명 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최전성기인 카를 5세의 제국이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을 사실상 다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유럽 내 영토의 인구만 놓고 보면 동시기 프랑스와 간신히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을 정도였다. 프랑스를 자꾸 비교하는 이유는 그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보다 인구가 적었기 때문. 물론 러시아의 경우엔 서구 국가들보다 정부 시스템이 심하게 딸렸기 때문에 집계되지 않은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서 실제 인구는 더 많았을 거라 추정한다. 카를 5세가 괜히 프랑스를 경계한 게 아니다. 현재의 6천만 프랑스 인구가, 8천만을 자랑하는 독일이나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한 터키에게도 밀리는 건, 18세기 말에 터진 프랑스 혁명부터 프랑스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기까지 프랑스의 고령화 + 전쟁으로 인한 청년들의 대규모 전사 + 저출산이 3종 세트로 터졌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극악의 출산률을 선보이며 타국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증하는데 반해 인구가 늘지 않았고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100만 이상, 크림 전쟁 30만 이상을 투입한데다 보불전쟁 때는 사상자만 35만으로 전국의 젊은 남성들이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나마 냉전 이래로 혼외 가정의 합법화, 셋 이상의 자녀를 출산한 여성에 대한 연금 지급 등 각종 인구 부양책에 힘입어 선진국들 중 가장 높은 출산율을 자랑하며 조금씩 인구를 회복 중이다.[35] 이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포함한 열강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았다. 인구학자들이 만약 프랑스가 이 당시에 인구가 증가했다면 최대 3억, 최소 1억을 넘는 인구 대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 물론 최근엔 출산율의 상승과 이민으로 다시 독일을 능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여담으로 16세기 초반의 영국 인구는 400만에 불과했다. 심지어 1707년에 스코틀랜드와 합치고도 인구가 천만도 안되는 700만에 불과했고 1800년대에 들어서야 천만을 넘겼다.[36] 15세기의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체 인구가 중동 1800만, 북아프리카 800만의 2600만밖에 안 되었다. 반대로 유럽은 이시기에 벌써 8천만을 넘겼다. 현재도 유럽은 인구가 7억 4천만에 달해 2억 6천만인 중동과 2억 3천만인 북아프리카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37] 명예로운 위치[38] 터번은 동로마 제국에서도 많이 썼으며 동로마 제국 후기로 갈수록 중동, 튀르크의 영향을 받은 복식들이 많아졌다.[39] 따라서 수도도 루멜리(루멜리아)에 하나(에디르네), 아나돌루(아나톨리아)에 하나(부르사). 이렇게 두 군데 두어야 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수도가 두 군데 있어서는 효율적인 통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40] 장군 중의 장군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군대 총사령관이라는 뜻이지만, 에디르네를 중심으로 루멜리 에얄레트를 창설할 때에 에디르네 함락을 주도한 지휘관에게 베일레르베이라는 칭호가 하사된 이래로 지방 총독을 뜻하는 말로 바뀌기 사작한다.[41] 다만 카디가 모두 카자를 통치한 것은 아니고, 베일레르베이나 산작베이의 측근으로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42] 이런 경우는 주로 국경 방어를 위한 경우였다.[43] 가령 그리스와 보스니아, 다뉴브 강 하류 일대를 제외한 남동유럽 거의 대부분을 관할하는 루멜리아 에얄레트가 대표적인 예. 루멜리아 에얄레트를 통치하는 베일레르베이는 모든 베일레르베이 가운데 가장 윗자리로 여겨졌으며, 때로는 재상 이하 고관들의 중앙 회의 기구인 디반(Divan)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44] 연간 수입의 1/40을 매년 1회 납부[45] 이를테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이혼, 이슬람의 이자대출[46] 이 칙령이 담긴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보스니아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47] 메흐메트 4세만 해도 카자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수호자라고 칭했다.[48] 사실 황가고 일반 농민이고간에 여러 민족의 피가 마구 섞였기 때문에 '터키인' 을 혈통이나 민족상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같은 경우도 고민하다가 혈통이 아니라 '터키어를 사용하며 터키에서 살아가면 터키인' 이라고 정의했다.[49] 본명은 클로드 알렉상드르 드 본느발(Claude-Alexandre de Bonneval).[50] 본명은 루트비히 카를 프리드리히 데트로이트(Ludwig Karl Friedrich Detroit).[51] 본명은 콘스탄티 보르젱츠키(Konstanty Borzęcki).[52] 동유럽에 거주하는 라틴족의 갈래. 말하자면 현대 루마니아 민족의 역사적인 명칭이라 봐도 되긴 한데, 사실 서로마 멸망 이후 수천년 동안 그 일대에 살던 라틴족들이 슬라브, 오스만 문화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한 경우도 많고, 게다가 블라흐란 단어 자체가 루마니아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3개 지방 중 왈라키아 중심적인 말이며, 또 발칸 반도 현지에서는 무식한 촌부를 지칭하는 경멸적인 단어로 사용 된 흔적도 있어 적어도 현지인, 학자들은 사용할 때 주의를 하는 표현으로 보인다.[53] 오늘날 이라크[54]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55] 이집트는 BC 31 ~ AD 641에서 말기 사산왕조의 점령을 제외하면 650년 내외, 레반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병탄 시점인 BC 63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630년대 후반까지 거의 정확하게 700년에서 마찬가지로 사산을 빼면 600여년 후반 정도.[56] 참고로 생뚱맞은 대목이지만 이 스미르나 대화재는 태평양 전쟁을 다룬 미국의 대하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레키가 호주에서 작업 걸던 이민자 여성의 이야기로 언급 된다.[57] 물론 중동 지역이 남동유럽과 아나톨리아보다 척박한 것도 있다.[58] 물론 다시 터키 귀국이 허용되었다.[59] 비록 무슬림을 핵심적인 지배 계층으로 추구하긴 했지만, 동시대에 비슷하게 세계적인 보편제국(monarchia universal)을 추구했음에도 종교적 통일 이룬답시고 나라 안에 경제적, 기술적으로 핵심 계층을 이루었던 무슬림, 유대인들을 일괄 싸그리 추방해버리고 개신교도들을 탄압하여 반발한 개신교 귀족과 시민들의 반란이 일어난 합스부르크 스페인 제국과 비교해 보자.[60] 문자적으로는 '압드 알하미드'이나, 구어체상에서는 축약된 형태인 압둘하미드라 읽힌다.[61] 에르투으룰 가지는 오스만 1세의 아버지로, 오우즈족에 속하는 카이으(kayı) 부족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본래 몽골의 침입을 피해 그의 아버지대에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임시로 피난을 왔지만, 당시 룸셀주크와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셀주크를 지원하면서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위치한 카라자 다으(Karaca dağ) 일대를 봉토로 받고, 쇠위트(Söğüt)에 수도를 정해 공국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에르투으룰 가지가 죽고나서 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1299년에 독립해 오스만 제국을 세웠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에르투으룰 가지의 공국도 오스만 역사로 포함시킨다.[62]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후, 그 아들 사형제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벌인 기간. 결국 넷째인 메흐메트 1세가 승리하여, 단독 술탄이 되었다.[63] 1차 재위[64] 1차 재위[65] 2차 재위[66] 2차 재위[67] 괄호 안의 부분에서 '엄격제' 에 해당하는 부분은 'Yavuz'인데,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해진 것이 없는 듯하다. 터키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 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68] 1차 재위[69] 2차 재위[70]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터키 공화국 정부는 오스만 가문(Osmanoğlu)을 터키에서 추방하여 입국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케말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36년뒤인 1974년에 해제되었으나 실제 오스만 구 황가의 터키 귀국은 2004년에 와서야 이뤄졌다.[71] 11월 1일에 술탄에서 폐위당했지만 칼리파는 17일이 지나서야 터키 의회가 사촌인 압뒬메지트를 후임자로 선출했기 때문이다.[72] 이시형 교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인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다.(참고)[73] 2004년에서야 터키 국적을 회복한다. 간혹 최후의 오스만이라고 일컬어 진다. 계승자들이 제국 붕괴 이후 태어났기 때문.[74] 이후 확장팩에서 인도나 중국,일본 등 아시아 일부도 나오기는 하는데, 오스만은 인도와 교류를 조금 했을 뿐이지 식민지배를 한 적이 없으며 동아시아와는 거의 무관했다.[75] 북마크의 마지막 연도